《Littor릿터》 독자 수기 공모

제목 : 당신이 잘 됐으면 좋겠어요

주말이지만 특별할 것 없던 그 날, 퇴근 후 TV를 켜놓고 ‘오늘 저녁은 어떻게 때울까?’ 고민중이었다. 혼자가 편했으나 사람 소리가 그리워 늘 무어라도 틀어놓았다. 집중해서 듣거나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적막한 공기를 깨고 싶었다.
화면에 주의를 귀울이지 않다가 들려온 노래 한곡에 모든 생각이 멈춰졌다. 노래 한곡이 내 귀로 들어와 마음을 덜컥 내려앉게 했다. MBC ‘듀엣가요제’에서 정인씨가 일반인 참가자와 함께 불렀던 노래, 그 어떤 말로도 그 순간을 다 표현할 수 없다. 마음의 일렁임과 가득 채웠던 슬픔으로 찾아와 위로로 남았던 순간, 이 순간을 만들어 냈던 것은 정인씨의 목소리도 가사의 내용도 아니었다. 일반인 참가자 ‘최효인’의 목소리는 집 안의 적막함을 깨는 것을 넘어서 내 삶의 적막함을 저 멀리 밀어냈다.
그 날 이후 ‘최효인’은 더이상 나에게 일반인이 아니었고 나의 Idol이 됐다. 어느 때보다 간절하게 그냥 무턱대고 누군가에게 빌기 시작했다. ‘제발, 이 친구는 잘 되게 해 주세요!’ 듀엣 가요제로 효인씨가 대중의 관심을 받게 되어 기뻤다. 하지만 이 관심이 오래 가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효인씨의 미래가 걱정됐다.
아주 잠시 ‘내가 모라고 이런 걱정을 하고 있나.’ 어이없어 했지만 ‘묻히게 그냥 두기에는 너무 아까운 목소리다.’라는 생각이 더 컸고 ‘이제 빛을 보기 시작했는데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라는 이상한 사명감까지 생겼다. 그래서 나는 이 이상한 사명감으로 무모하게 효인씨의 SNS로 연락을 했고 팬카페에 대해 1도 모르면서 ‘팬카페를 만들어 드리고 싶습니다.’ 했다.
2016년 9월 19일 ‘가수 최효인님 네이버 공식 팬카페, 효움’은 이렇게 생겼고 나는 오늘까지 카페의 매니저다. 한국에 살지도 않으면서 나는 덜컥 ‘덕질’의 최전선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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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차가 있다는 것도 잊고 수시로 연락하며 효인씨의 첫 콘서트를 함게 준비했다. 그리고 그렇게 준비한 콘서트 날 나는 무대 뒤에서 눈물을 글썽이며 그 자리를 함께했다.
좋은 목소리를 가진 친구이기만 했다면 효인씨의 무대를 위해 한국에 갈 생각은 안 했을 거다. 지금까지 봐온 효인씨는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늘 노력하고 진심으로 노래하려 애썼다. 영악하고 자기 이익을 챙겨야 할 때도 영악함이란 찾아볼 수 없고 그저 걱정될 정도로 맑고 선한 사람이었다.
‘당신이 잘 됐으면 좋겠어요.’라는 마음 하나로 여기까지 왔고 앞으로도 이 마음은 지켜내고 싶다. 현실과 꿈의 거리는 여전히 멀고 바라는 모든 일을 해드리기에 내 능력은 너무 제한적이다. 그래서 안타까운 마음이 늘 떠나지 않는다. 그래도 나는 실력있는 가수 ‘최효인’ 못지않게 아끼는 동생으로 ‘최효인’이라는 사람의 인생을 오래도록 최선을 다해 응원하고 싶다.

1주년기념 (1)

당신이 잘 됐으면 좋겠어요.

팟 캐스트 , 이게뭐라고.’에서 ‘김동식’ 작가와 함께 그 분의 책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작가는 ‘오늘의 유머’ 공포 소설 게시판에 짧은 이야기를 올렸고 그 이야기들에 달린 호의적인 댓글에 더 많은 글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낮에는 공장에서 일 하고 밤에 틈틈히 글을 썼다는 그는 전문적인 글쓰기 훈련을 거친 적이 없었고 그저 사람들이 좋아해 주는 이야기를 더 많이 쓰고 싶다는 생각에 계속 글을 썼다. 이렇게 쓰여진 글이 묶여져서 세 권의 책으로 나오고 그는 지금 베스트셀러 작가다.

‘오늘의 유머’가 업어 키운 작가라 불리는 김동식 작가는 처음으로 독자와 만나는 자리에서 그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 독자들을 만난다. ‘죄송하지만 저는 저 분들이 왜 우시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제가 이런 주인공 같은 대우를 받아도 되는 건가 라는 생각만 계속들고…’ 작가와 독자가 만나는 자리에서 이런 광경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 자리에 참석한 한 독자가 ‘책 잘 읽었어요. 그리고 저는 작가님이 잘 됐으면 좋겠어요.’라며 눈시울을 붉혔고 이 모습을 지켜보던 독자들도 울고 진행을 하셨던 또 다른 작가분은 눈물을 참느라 애를 먹었다고 하셨다.

그 분들은 왜 우셨을까? 우는 순간 그분들의 마음 속에는 어떤 감정이 담겼을까?

책 이야기를 하던 팟 캐스트는 자연스럽게 ‘왜, 어떤 마음으로 그 분들은 작가님이 잘 되기를
바란다며 우셨을까요?’하며 그 이유를 주제로 이야기를 진행했다.

나와 아무 연결 고리가 없던 사람에게 ‘당신이 잘 됐으면 좋겠어요, 그 어느 때보다 진심으로 그렇게 되기를 바래요.’ 라고 말해 주고 그렇게 되기를 오롯히 바라는 마음…
내게도 그런 친구가 있기에 방송을 진행하시는 분들이 생각하는 그 ‘이유’가 무척이나 궁금했고 그 어느 때보다 집중해서 방송을 들었다.
팟 캐스트에 나오신 분들이 말씀하신 이유는 마음을 울리는 사연이 있더라도 작품이 좋지 않았다면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을 거라는 것, 그리고 그 독자분들은 김동식 작가님이 잘 되고 발전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시고 미래에 어떤 모습이실지 무척 궁금해 하시는 것 같다는 것…

맞다. 안타까운 사연이 처음에는 마음에 잠시 남았지만 그 이유가 전부는 아니었다. 가지고 있는 재능이 들려주었던 노래가 안타까운 사연보다 더 오래 남았고, 나는 그 친구가 잘 되고 발전하고 성장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졌고 미래에 어떤 모습일지도 무척 궁금해졌다.

방송에 출연 하신 또 다른 분은 김동식 작가님을 통해 독자들이 희망을 보신 것 같다고 하셨다. 김동식 작가는 그의 삶의 배경이나 작가로써의 시작이 화려하거나 그럴듯해 보이지 않았고 심지어 전문적 교육을 받은 적도 없었지만 주류의 작가들이 무엇을 하고 있든지 상관없이 꾸준히 사람들이 좋아하는 글을 쓰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했고 결국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다. 선천적 또는 후천적으로 더 많이 가지고 있지 않으면 성공적인 삶을 사는 것이 너무 어려운 사회에 살다보니 독자들은 김동식 작가의 모습에서 그래도 열심히 하면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본 것 같다고 하셨다. 그러니 작가님이 혼자 잘 먹고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 질 되시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잘 되니 나도 잘 될 수 있고 우리 모두는 이렇게 서로에게 선한 영향력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연대의식으로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이라 하셨다.

이 역시나 맞다. 내가 마음을 다해 잘 되기를 바라는 그 친구도 현재 한국 가요계 내 주류에 속해 있다고 할 수 는 없다. 하지만 보는 음악이 대세인 요즘 듣는 음악을, 본인이 원하는 스타일대로 꾸준히 포기하지 않고 해 왔고 지금도 하고 있다. 게다가 가진 재능이 뛰어남에도 늘 부족하다며 스스로를 낮추고 사람들을 속이는 노래를 하지 않는다. 영악하고 남보다 자기를 더 챙겨야 빨리 성공하는 곳이 한국 가요계인데 영악함이란 찾아볼 수도 없고 그저 걱정될 정도로 맑고 선하고 남 상처주느니 차라리 내가 상처 받는 것을 선택하는 친구다. 이런 친구이니 잘 되었으면 좋겠다. 이런 친구가 잘 된다면 우리가 누군가를 속이고 상처를 주지 않아도 잘 될 수 있다는 희망의 징표를 볼 수 있다. 이 친구가 잘 된다면 마음 불편하게 누군가를 속이고 밟고 올라가지 않아도 나도 우리도 모두 잘 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김동식 작가와 너무 닮아 있는 이 친구가 잘 됐으면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고작 ‘오래 옆에서 지켜봐 줄께요.’ 라는 약속이 실질적으로 지금의 내가 해 줄 수 있는 전부겠지만 그래도 오래 옆에서 무대에 설 때마다 ‘잘 됐으면 좋겠다.’며 눈물 흘려주는 일은 언제까지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이다.

팬덤, 무한한 다양성을 키울수 있는 곳

 

다른 생활습관에 자신을 노출시키고 인간 본성의 무한한 다양성을 구경하는 것보다 더 나은 삶의 학교를 모르겠다. – 몽테뉴 –

먹고 살기 위해 이미 받아본 선택지가 수 십장 이었을테니 먹고 사는 일과 상관없는 일에서도 선택지에서 무엇인가를 골라야한다는 것은, 분명 귀찮은 일이다.

사람들에게 문화란 그저 고민없이 편히 누려도 될 것들이다.

그러니 ‘베스트 셀러’, ‘천만 관객’, ‘음원 차트 100위’ 이미 다 차려놓은 상위의 음식을 즐기듯 즐겨도 이상할 일이 아니다. 다 차려놓은 상위의 음식 말고도 더 다양한 것들을 즐길 수 있다거나, 넓지 않은 상이다 보니 오르지 못한 음식은 당연히 많고 이 음식들을 만들어내기 위한 누군가의 땀과 눈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지 하지 못해도, 이 역시나 하나도 이상할 일이 아닌거다.

하지만 우리가 손쉽게 누리는 문화의 핵심은 무엇일까?

‘문화의 핵심은, 보이지 않는 것의 발견, 감정의 세분화, 다름의 향유다.’ – 글쓰기의 최전선, 은유 –

이런 아이러니가 있나? 문화는 다름의 향유라는데!!! 우리는 과연 ‘다름’을 향유하고 있어왔는가?

은유 작가님은 문화를 정의하시면서 우리는 양산된 ‘감정의 평준화’안에서 나쁜 문화를 향유하고 있다고 지적하셨다.

‘감정의 평준화’를 양산하는 주범은 ‘대량생산’해서 ‘대량소비’를 끌어내고 이를 통해 자본을 축적하겠다는 창작자들과 대중사이에 있는 중개자들이다. 그리고 특히나 음악시장에서는 중개자들의 계획대로 ‘대량소비’의 축이 되어주고 있는 ‘팬덤’도 주범이라 할 수 있다.

주류는 아니더라도 ‘팬덤’ 또는 ‘덕질’로 불리는 현상의 최전방 어딘가쯤에 서고보니 나는 이전과 다른 ‘생활습관’에 자연히 노출이 되었고 다른 사람의 인생과 꿈을 상상하는 자리에 서게 되었다.

내 덕질은 주류라 불리는 대상을 향한 것은 이니지만 그렇게 불렸다면 알지 못했을 무한한 다양성을 가진 대상이다. 그렇기에 나는 다양성이 가지는 가치를 소중히 여기게 되었고 볼테르가 말한 ‘가장 나은 삶의 학교’에 입학을 했다.

문화의 진정한 핵심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주류에 속하지 않는 비주류임에도 포기하지 않는 그들을 응원하는 일, 100위 밖에 있어도 그들을 위한 팬덤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특정 문화 컨텐츠만을 위한 중개자들의 무차별적 홍보 전략에 편승해서 자신들이 좋아하는 아티스트를 해당 문화시장에서 독점적 위치에 오래 붙잡아 두려고 하는 주류 팬덤이 주변을 조금은 돌와봐주기를 바란다. 주류가 아님을 알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다양성을 생산해 내는 아티스트들도 먹고 살수 있게 시장의 파이를 좀 나누어 가지게 해주자.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것을 뱔견하고 이를 통한 감정의 세분화를 느끼고 다름을 향유할 수 있게 해주기를 바란다.

이렇게 된다면 우리는 함께 몽테뉴가 말한 무한한 다양성의 학교를 만들 수 도 있는 일이다.

“Get up! Pick up your mat and walk.”

100위 그리고 카메라 밖에도 음악이 있고 누군가의 시간과 노력이 있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선을 긋고 그 아래 있는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대하는 무심함 때문에,  그들만의 잔치에 끼지 못할 때 주어지는 박탈감 때문에,  나는 괜히 혼자 불쑥 치밀어 오르는 화를 달래며 연말을 보냈다.

그러면서 동시에 나 역시나 무심했었던, 박탈감을 안겨주던 대중이었던 적이 있었기에 또 괜히 혼자 지난 날을 반성하며 연말을 보냈다.

이제는 보이는 그 ‘선’ 근처에 모여든 턱걸이 하는 모습들…
어떻해서든지 철봉을 붙잡고 턱걸이를 하는 것 처럼, 팔의 모든 근육을 사용해서 위로 오르려고 안간힘을 내고 있는 간절한 목소리들이, 힘을 내는 얼굴들이 보이는데

누가 감히, 당신들이 뭐라고 그들의 수고와 노력을 재단하려 드는건지…

말도 안 되는 이 프레임에서 모두 다 같은 방법으로 경쟁하고 있으니, ‘우리도 경쟁을 하고 순위에 올라야 한다.’며 정직하지 않은 방법을 궁리하고 함께 하자 독려하는 것이, 나는 영 마음에 내키지 않는다.

치료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베데스다 연못가의 앉은 뱅이는 도와주겠다는 예수께 ‘나를 저 연못에 넣어주세요.’라고 부탁헸지만, 예수께서는 대뜸 ‘너의 자리를 들고 일어나라.’ 하셨다.  아이러니하게도 베데스다 연못가에도 말도 안 되는 프레임이 존재했다. 진짜 치료가 필요한 병이 심한 자들보다 증상이 심하지 않기에 몸을 움직이기가 수월했던 사람들이 베데스다 연못이 움직일 때 가장 먼저 뛰어들어가 고침을 받았다. 이렇게 프레임이 정해져 있으니 앉은뱅이가 바라는 (혹은 생각해 낼 수 있는) 가장 큰 도움은 ‘나를 들어 연못가에 넣어 주는 것’이었겠으나, 예수께서 보시기에 이건 말도 안되는 부탁이었던게 분명하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너의 상상 너머의 일인데 고작 내게 이런 하찮은 부탁을 하다니!!!’ 하시지 않았을까? 그러면서 아주 쿨하게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가라!’ 하시며 앉은뱅이를 낮게 하셨으니 말이다.

엉뚱하게도 나는 분노와 반성으로 연말을 보내면서 내내 베데스다 연못가의 이야기가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나도 ‘너의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가라.’라는 이런 초월적인 발상이 떠오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더 엉뚱한 상상도 함께 하면서…

사족…
베데스다 연못가의 이야기는 신학적으로 아주 엉뚱한 해석이 아닙니다. 혹 저의 정신세계에 대해 의구심을 품으실 분들이 계실까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