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the value is…

우리 동네에서 신선하고 ‘좋은 과일이나 야채를 사고 싶다’고 하면 주변분들은 늘 같은 곳을 추천하신다.
멕시칸 분들이 하시는 ‘Rancho Market’
갈 때마다 내가 낸 돈에 비해 내 손에 들려나오는 과일들이 많아서 놀라고, 집에 와 그 과일들을 먹으면서 ‘이 과일들은 왜 이렇게 쌀까?’라는 남들은 안 궁궁한 걸 궁금해 하곤 했다.

‘산지 직송일까? 그런 것 같지는 않고, 그러면 유통마진을 줄이는 특별한 방법이 있을까? 그렇다고 해도 너무 싼데….분명 이 과일이 나에게 오는 과정에 누군가가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지 못했을 수도 있겠구나….’

한 때 Walmart가 사람들의 엄청난 비난을 받은 적이 있었다.
Walmart의 물건들은 같은 물건이라도 다른 곳에 비해서 싼 편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찾았고 덕분에 Walmart는 미국 내 없는 곳이 없는 회사로 성장한다. 하지만 알고 보니 물건 값이 쌌던 이유는 바로 매장에서 일 하는 직원들이 받는 월급 때문이었다. 매장 직원들에게 동종 업계에서 지불하는 것 보다 적은 월급을 주었고 덕분에 소비자는 싼 물건을 살 수 있었고 회사는 성장했다.

이 일이 알려지고 난 후 Walmart 물건은 사지 않겠다는 불매운동이 일어났고 회사는 직원들에게 정당한 대우를 하겠다고 약속을 하면서 훈훈하게 마무리가 된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싼 Walmart의 물건을 보면서 여전히 의심하는 중이다.

‘모르는게 약’이라고 몰랐더라면 좋았을텐데…
‘알아두면 쓸데없는’ 세상사에 관심이 많은 나는 내 밥상에 올라와 내 입으로 들어가는 먹거리가 지나오는 과정들이 어떻다는 것을 알아버려서 무조건 싼 물건들을 기쁘게 살 수가 없다.

그렇다고 누군가가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지 못해서 내가 이득을 볼 수도 있다는 사실에 불같이 분노하고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radical한 활동을 하고 있지도 않다.

그저 Rancho Market을 너무 자주 가지 않고 터무니없이 싸게 파는 물건이라고 기쁘게 사지 않는 정도의 일을 할 뿐이다.

의식주라는 인간의 기본적인 삶과 관련한 물건을 생산하거나 관리하는 일이 아니더라도 어느 누구라도 그들이 한 노동과 노력애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아야 한다. 물론 그들이 한 노동과 노력이 사회에 해가되는 일이 아니라는 전제하에…

직접적으로 삶에 필요한 것과 관련해서는 꽤 많은 분들이 그 생산 과정에서 누군가가 피해를 보거나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는 것에 민감해 하시고 같이 분노해 주시기도 한다. 하지만 유독 문화와 예술 분야는 정당한 대가에 대한 사람들의 민감도가 떨어진다.

지적재산권이라는 개념이 자리를 많이 잡아가고 있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인터넷에서 공짜로 음악을 구해서 듣고 종이책이 아닌 pdf 파일을 찾아내서 읽고 원작자를 표시히지 않고 이미지나 사진을 구해서 본인의 블로그에 올린다.

이쯤 되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사람들은 음악이나 책, 그림들은 크게 돈을 들여 살 만한 가치가 없으니 가능하다면 공짜로 누리자’인건가?

문화나 예술의 가치를 어떻게 봐야 하는 가는 결국은 그것들의 존재 이유 또는 역할을 되집어봐야 가능한 듯 싶다.

불가지론자(신이 있는지 없는지 나는 모른다는 사람)도 무신론자도 아닌 나는 세상에 존재하게 하신 것은 모두 나름의 이유가 있다 믿는다. 이런 믿음 때문에 삶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가장 기본이 되는 것들과 마찬가지로 음악과 미술로 대표되는 모든 종류의 창작행위와 그 결과물은 분명 존재해야 아는 이유가 있다고 여긴다.

의식주를 해결해 주는 것들은 우리 삶에서 맞닿뜨리는 모슨 순간을 충만하게 채워주지 못한다. 또한 이것들은 세상과 사람들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지도 않는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것들이 이미 충분한데도 불구하고 병적으로 쇼핑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그 지경에 이른 것은 그들의 마음에 해결되지 못한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다. 외로움이 되었든 우울함이 되었든 말이다. 먹고 사는 일에 문제가 없는데도 삶에 대한 의욕이 사라지고 무력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상황에 처한 모든 사람들이 그렇다 할 수는 없겠지만 상당수가 음악이나 그림, 문학작품을 통해 그들의 결핍이 채워지는 경험을 한다.

또한 예술작품의 창작자들은 그들이 이해한 세상을 그들의 작품에 실어낸다. 이런 결과물들은 우리에게 단순한 아름다움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다양한 시선을 선물하기도 한다.
창작자가 작품안에 자신의 이야기를 담거나 또는 그들 주변의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담아내어 보여줄 때 우리는 세상과 사람을 대하는 우리의 지경이 조금씩 넓어지는 경험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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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urtesy of www.VincentVanGogh.org

‘인물을 그리건 또는 풍경을 그리건
화가들은 그림이 거울속의 자연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따라서 그림은 모방이나 복제가 아니며 오히려 재창조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입증해 보이려는 성향을 지니고 있다.’
– 빈센트 반 고흐 –

이 구두로 고흐는 새로운 시선을 ‘재창조’ 했고 철학자 하이데거는 이 구두를 통해 고흐가 형상화한 ‘농부의 고단한 삶’을 본다.

[출처: 중앙일보] [박영욱의 생활에서 만난 철학] 하이데거 – 고흐의구두는세계를담고있다

고흐는 자신의 그림이 사람들을 어루만져주기를 바랬다. 그의 바램대로 많은 이를 어루만져준 고흐의 완벽한 그림은 감정을 너무 많이 느낀 그의 예민함의 결과였고 동시에 그 예민함은 고흐에게 불안하고 불행한 삶을 남긴다.

고흐가 살던 시대에 고흐의 작품을 좋아하고 그의 활동을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았으나 그가 원하는 그림을 그리며 삶을 이어나가기에 충분한 정도는 아니었던 듯 하다.
그렇다면 오늘날 고흐가 살아서 그림을 그렸더라면 어땠을까?

열광하는 사람은 당시보다 더 많아졌을 수는 있으나(블로그나 인스타로 널리 널리 알려질테니) 그의 작품이 정당한 대우를 받을지는 모르겠다. 여전히 열광은 하는데 노래를 하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시를 쓰는, 자신들이 좋아한다고 말하는 그 아티스트들이 정당한 대가를 받고 있는지는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있는 시대이니 아무리 엄청난 그림을 그리는 고흐라 해도 별 수 없을 듯 하다.

‘창작자와 입장과 일반 대중이 느끼는 가치가 또 다른지라…’

그림을 그리시는 어느 분이 흘리듯 하셨던 이 말을 왠지 고흐도 했을 거 같고…

4차 산업혁명이니 인공지능이니 하는 말들로 신문이 도배가 되고 우리의 일자리를 기계가 다 차지할 지 모른다는 불안한 말들이 사람들 입에서 오르내린다. 자식 교육에 열성적인 부모들은 내 자식에게 어떤 교육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이런 저런 trend를 들으러 다니느라 분주하다.

결혼도 아직이고 자식도 없으니 내가 교육에 대해 이런 말 하는 게 맞나 싶긴 하지만, 나라면 내 아이들에게 더 다양하고 많은 음악을 듣게 하고 그림을 보게 하고 시를 읽게 할 것이다. 그러면서 이 아름다움 것들은 누군가의 고민과 노력으로 창작되었고 우리는 그 분들 덕에 볼 수 없는 것들을 보고 듣고 느끼게 되었으니 감사해야 한다 말할 것이다.

팬덤, 무한한 다양성을 키울수 있는 곳

 

다른 생활습관에 자신을 노출시키고 인간 본성의 무한한 다양성을 구경하는 것보다 더 나은 삶의 학교를 모르겠다. – 몽테뉴 –

먹고 살기 위해 이미 받아본 선택지가 수 십장 이었을테니 먹고 사는 일과 상관없는 일에서도 선택지에서 무엇인가를 골라야한다는 것은, 분명 귀찮은 일이다.

사람들에게 문화란 그저 고민없이 편히 누려도 될 것들이다.

그러니 ‘베스트 셀러’, ‘천만 관객’, ‘음원 차트 100위’ 이미 다 차려놓은 상위의 음식을 즐기듯 즐겨도 이상할 일이 아니다. 다 차려놓은 상위의 음식 말고도 더 다양한 것들을 즐길 수 있다거나, 넓지 않은 상이다 보니 오르지 못한 음식은 당연히 많고 이 음식들을 만들어내기 위한 누군가의 땀과 눈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지 하지 못해도, 이 역시나 하나도 이상할 일이 아닌거다.

하지만 우리가 손쉽게 누리는 문화의 핵심은 무엇일까?

‘문화의 핵심은, 보이지 않는 것의 발견, 감정의 세분화, 다름의 향유다.’ – 글쓰기의 최전선, 은유 –

이런 아이러니가 있나? 문화는 다름의 향유라는데!!! 우리는 과연 ‘다름’을 향유하고 있어왔는가?

은유 작가님은 문화를 정의하시면서 우리는 양산된 ‘감정의 평준화’안에서 나쁜 문화를 향유하고 있다고 지적하셨다.

‘감정의 평준화’를 양산하는 주범은 ‘대량생산’해서 ‘대량소비’를 끌어내고 이를 통해 자본을 축적하겠다는 창작자들과 대중사이에 있는 중개자들이다. 그리고 특히나 음악시장에서는 중개자들의 계획대로 ‘대량소비’의 축이 되어주고 있는 ‘팬덤’도 주범이라 할 수 있다.

주류는 아니더라도 ‘팬덤’ 또는 ‘덕질’로 불리는 현상의 최전방 어딘가쯤에 서고보니 나는 이전과 다른 ‘생활습관’에 자연히 노출이 되었고 다른 사람의 인생과 꿈을 상상하는 자리에 서게 되었다.

내 덕질은 주류라 불리는 대상을 향한 것은 이니지만 그렇게 불렸다면 알지 못했을 무한한 다양성을 가진 대상이다. 그렇기에 나는 다양성이 가지는 가치를 소중히 여기게 되었고 볼테르가 말한 ‘가장 나은 삶의 학교’에 입학을 했다.

문화의 진정한 핵심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주류에 속하지 않는 비주류임에도 포기하지 않는 그들을 응원하는 일, 100위 밖에 있어도 그들을 위한 팬덤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특정 문화 컨텐츠만을 위한 중개자들의 무차별적 홍보 전략에 편승해서 자신들이 좋아하는 아티스트를 해당 문화시장에서 독점적 위치에 오래 붙잡아 두려고 하는 주류 팬덤이 주변을 조금은 돌와봐주기를 바란다. 주류가 아님을 알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다양성을 생산해 내는 아티스트들도 먹고 살수 있게 시장의 파이를 좀 나누어 가지게 해주자.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것을 뱔견하고 이를 통한 감정의 세분화를 느끼고 다름을 향유할 수 있게 해주기를 바란다.

이렇게 된다면 우리는 함께 몽테뉴가 말한 무한한 다양성의 학교를 만들 수 도 있는 일이다.

put yourself in one’s shoes

사랑을 할 거라면…

이타적인 사랑을 하자. 이기적인 사랑 말고…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의 첫인상은 이타적이지만 그 첫인상이 사라지고 나면 사랑은 이기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만다. ‘너를 사랑하고 있는 나를 사랑하는 모습’

‘너와의 핑크빛 관계가 주는 설레임과 즐거움을 사랑하는 나의 모습’

‘너라는 사랑의 대상이 나에게 주는 삶의 활력과 변화를 사랑하는 나의 모습’

점점 ‘너’는 없어지고 ‘나’만 남는 이기적인 사랑…

이 사랑의 시작은 ‘너’였으나 지금은 ‘나’만 남아 결국은 ‘나’ 때문에 부서지고 마는 사랑… 남녀사이의 사랑 뿐 아니라 사랑이라 불리워지는 모든 관계가 같은 모습으로 시작되었다가 부서질 수도 있다는 것을… 이렇듯 누군가를 ‘사랑한다.’라고 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

상상이상으로 우리는 이기적이어서 이타적인 사랑의 모습을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

내 감정만이 우선될 것이 아니라 매 순간 나를 돌아보고 고쳐가며 해야 하는…진정으로 상대를 사랑하다면 그렇게 사랑을 함부로 할 수는 없다.

put yourself in one’s shoes

“Get up! Pick up your mat and walk.”

100위 그리고 카메라 밖에도 음악이 있고 누군가의 시간과 노력이 있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선을 긋고 그 아래 있는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대하는 무심함 때문에,  그들만의 잔치에 끼지 못할 때 주어지는 박탈감 때문에,  나는 괜히 혼자 불쑥 치밀어 오르는 화를 달래며 연말을 보냈다.

그러면서 동시에 나 역시나 무심했었던, 박탈감을 안겨주던 대중이었던 적이 있었기에 또 괜히 혼자 지난 날을 반성하며 연말을 보냈다.

이제는 보이는 그 ‘선’ 근처에 모여든 턱걸이 하는 모습들…
어떻해서든지 철봉을 붙잡고 턱걸이를 하는 것 처럼, 팔의 모든 근육을 사용해서 위로 오르려고 안간힘을 내고 있는 간절한 목소리들이, 힘을 내는 얼굴들이 보이는데

누가 감히, 당신들이 뭐라고 그들의 수고와 노력을 재단하려 드는건지…

말도 안 되는 이 프레임에서 모두 다 같은 방법으로 경쟁하고 있으니, ‘우리도 경쟁을 하고 순위에 올라야 한다.’며 정직하지 않은 방법을 궁리하고 함께 하자 독려하는 것이, 나는 영 마음에 내키지 않는다.

치료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베데스다 연못가의 앉은 뱅이는 도와주겠다는 예수께 ‘나를 저 연못에 넣어주세요.’라고 부탁헸지만, 예수께서는 대뜸 ‘너의 자리를 들고 일어나라.’ 하셨다.  아이러니하게도 베데스다 연못가에도 말도 안 되는 프레임이 존재했다. 진짜 치료가 필요한 병이 심한 자들보다 증상이 심하지 않기에 몸을 움직이기가 수월했던 사람들이 베데스다 연못이 움직일 때 가장 먼저 뛰어들어가 고침을 받았다. 이렇게 프레임이 정해져 있으니 앉은뱅이가 바라는 (혹은 생각해 낼 수 있는) 가장 큰 도움은 ‘나를 들어 연못가에 넣어 주는 것’이었겠으나, 예수께서 보시기에 이건 말도 안되는 부탁이었던게 분명하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너의 상상 너머의 일인데 고작 내게 이런 하찮은 부탁을 하다니!!!’ 하시지 않았을까? 그러면서 아주 쿨하게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가라!’ 하시며 앉은뱅이를 낮게 하셨으니 말이다.

엉뚱하게도 나는 분노와 반성으로 연말을 보내면서 내내 베데스다 연못가의 이야기가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나도 ‘너의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가라.’라는 이런 초월적인 발상이 떠오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더 엉뚱한 상상도 함께 하면서…

사족…
베데스다 연못가의 이야기는 신학적으로 아주 엉뚱한 해석이 아닙니다. 혹 저의 정신세계에 대해 의구심을 품으실 분들이 계실까 싶어서….

mission statement

“회사나 조직, 또는 개인의 핵심가치나 목표를 적은 글”

어떤 일을 시작함에 있어 핵심 가치나 그 일의 전체를 관통하는, 어떤 상황에도 변함없는 철학을 가지는 것은 너무 중요하다. 지랄맞은 성격탓에 무슨 일이든 처음부터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 있다면 다 짚어내야 하고 시간 걸려도 고민해서 먼저 해야 할 것을 먼저 완벽하게 해두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 쉽게 넘어가질 못 한다.

종종 내게 진로 상담하는 후배들에게 늘 하던 질문이 ‘그래서 그거 왜 하고 싶은데? 그거 할 수 있게 되고나면 그 다음은?’ 열정적으로 자기 계획을 이야기하다가도 이 질문을 반복적으로 듣고 나면 대부분의 친구들은 의기소침해진다. 모라 할말이 없어서…
사실 나는 일부러 의기소침해지길 바라고 그런 질문을 했었다. 이상하고 못된(?!) 선배라고 해도 난 그 친구들이 의기소침해지고 난 후 스스로 이유와 목적, 먹고 사는 직업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보다 삶을 관통하는 변함없는 철학을 먼저 가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해주고 싶었다.

최근에 다시 불붙은 나의 무모함과 추진력으로 친구와 함께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하려고 준비 중이다. 그리고 지난 주말 그 일을 위한 mission statement를 고민했고 내 개인적 mission statement가 이 일을 준비함에도 자연스럽게 나타난다는 것을 알게됐다. ‘나의 지경을 넓혀 남의 지경을 넒히는데 도움을 주자.’

우리의 계획대로 이 일의 미래가 항상 핑크빛이 아니더라도 우리의 mission statement가 변함없이 지켜진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히 내게는 재미있는 일일테고 나를 행복하게 해줄 일이다.